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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중앙동 단대오거리 가성비 삼겹살 맛집 삼미왕뚜껑

내돈내산 방문으로 소개드리는 찐맛집 시리즈입니다. 성남 중앙동 단대오거리역에서 친구와 가족 식사하기 좋은 삼겹살 맛집 삼미 왕뚜껑 소개드립니다. 친한 친구나 오래된 연인들이 혹은 가족들이 가성비 좋게 삼겹살을 먹고싶을때, 김치를 구어먹고 싶을 때 강추드리는 집입니다. 특히, 왁자지껄하게 삼겹살에 소주한잔 하고 싶을때는 딱 맞는 집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순서 친구들과 가족 외식으로 추천 영업시간, 위치 및 주차 메뉴 및 가격 내부 분위기 기본 세팅 및반찬 구성 구이판 모습 서비스 및 추가 메뉴 마무리는 볶음밥 마치며 친구들과 가족외식으로 강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시끌벅적한 친구 모임 편안한 가족식사로 추천드립니다. 만약 이제 막 만난 연인들이라던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찾으신다면 전혀 어울리지 않을 수 있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편안한 친구와 가족과 찾으시는 식당으로 강추 드립니다.  영업시간, 위치 및 주차 주소 : 경기 성남시 중원구 산성대로 340-7 단대오거리역 3번출구에서 300m 미만 영업시간 : 12시부터 저녁 10시까지, 매주 화요일 정기 휴일 공식적인 주차장은 없습니다. 단대오거리역 인근 공영주차장이나 인근 주변에 주차해야 합니다. 타지역에서 찾아오기에는 조금 번거롭고 지역 주민들에게는 가성비 좋게 방문하는데 좋습니다. 메뉴 및 가격 삼겹살이 주 메뉴입니다. 기본 삼겹살과 목살이 있고 칼잽이 삼겹살과 목살이 준비되어 있고 저렴하게 별미로 먹을 수 있는 냉동삼겹과 대패삼겹도 준비되어있습니다. 고기집에서 빠지면 섭섭한 계란찜, 볶음밥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가격이 굉장히 가성비 좋습니다. 삼겹살 200g에 14,000원으로 부담없이 먹을 수 있습니다. 삼겹살 가격을 비교 해도 다른 가게들과 비교해도 고기 가격은 좋은 편입니다.    내부 분위기 다 먹고 나오면서 내부 전경 찍은 모습입니다. 청소는 되어 있지만 고급스러운 분위기와는 조금 멀다고 보시면 되고 전형적인 친

미국 자동차 역사 소개

미국의 자동차 역사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드리려고 합니다. 
오늘날 미국을 자동차 왕국이라 하지만 19세기로 거슬러 올라 간다면 아무도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인데요. 19세기의 자동차 왕국은 프랑스였습니다. 이는, 자동차가 미국의 부를 상징하게 된 것은 20세기가 되어서부터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미국은 뒤늦게 시작하였는데 어떻게 왕국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 소개 드립니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은 크게 나누어 세 개의 산업분야가 참여하여 비롯되었다. 첫째는, 아메리칸 모터즈회사(AMCQ와 같은 자전차 산업이었다. 둘째는, 마차 제조업이었다. GM사는 마차제조를 하던 여러 중소기업이 자동차 제조에 뛰어들어 난립하다가 합병하여 이루어진 회사이다. 셋째분야는, 헨리 포드와 랜섬 올즈 같은 개인기술자들이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미국에는 여러 개의 자동차 회사가 난립하였으며 미국 자동차 역사로 볼 때 포프, 뷰익, 포드의 3사가 특히 두드러졌다.

포프 사가 자전차 시작품에 성공한 것은 1877년이었다. 당시 재봉틀 산업은 이미 수요의 한계가 엿보여 호환성 기술을 이용할 수 있는 자전차 산업으로 점차 이행하기 시작했다. 이때에 포프사의 자전차가 일약 각광을 받아 1880년대에는 미국 제 1의 자전차 회사로 성장했다.

그 후 포프사는 자동차 분야에 진출했다. MIT 출신의 기술사원 맥심이 설계한 휘발유 엔진으로 자동차를 시험 제작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 택시용 전기 자동차를 개발하여 1895년부터 2년간에 걸쳐 500대를 생산했다. 다시 그 후 포프의자동차 부문은 독립하여 전기 자동차 회사(EV)로 발족했다. 그러나 포프 본사는 자전차 생산에 전념하였지만 쇠퇴기를맞아 1902년에 도산하고 말았다.

미국 자동차 역사 소개글 썸네일

 EVC사는 전기 자동차로는 발전성이 없다고 생각하여 1899년에는 죠지 셀덴으로부터 휘발유 엔진의 특허권을 취득했다. 죠지 셀덴이 특허를 취득한 것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되어 있다. 그는 로체스터 출신의 기술자로, 우연히 자동차의 도면을 미국 특허청에 제출하여 1895년에 특허를 취득했다. 이것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미국 특허번호 549160의 셀덴 특허였다. 

그 당시 여러 사람이 여러 곳에서 자동차의 시작품을 이미 만들고 있었는데, 어떻게 도면 하나만 제출한 셀덴에게 미국 특허청이 특허를 인정했는지 불가사의로 남아있다.

당시 미국 최대의 자동차회사는 클리브랜드에 소재하는 자전차 회사로부터 발전한 윈턴 자동차회사였다. 최대라고 해도 유럽의 자동차 회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작은 규모였다. EVC사는 이 윈턴사와 합병하여 셀덴의 특허를 바탕으로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독점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셀덴 특허를 취득한 EVC사는 우선 여러 자동차 제작사를 특허 침해 소송으로 위협하여 결국 자사(社)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했다. 즉, 자동차 제조면허 조합(ALAM)을 설립하고 동 조합의 면허 없이는 자동차를 제조할 수 없게 만들었다. 
자동차 딜러들도 조합 이외의 자동차를 판매하면 소송 당할 것을 두려워 하여 조합에 참가했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자동차 관련 회사가 그 조합에 참여하게 되었고, 조합원 회사는 판매고의 1.25%를 조합회비 명목으로 납부해야만 했다.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일어난 것이 올즈사, 포드사 등이었다. 포드사는 1903년에 ALAM 조합에 가입하려 했으나 기술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소외된 회사들은 대립 조합으로서 미국 자동차 제조조합(AMCMA)을 결성했다. 이 조합에 참여한 회사는 모두 48사에 이르러 현재의 미국 자동차 제조조합(AMA)의 모체가 되었다. ALAMI AMCMA의 설립을 그냥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AMCMA를 상대로 대규모의 특허 소송을 제기(提起)했다. 그러나 법원은 우유부단한 태도로 일관하여 17년을 끌어오는 사이에 특허 유효 기한이 만료되었다. 1912년 셀덴의 특허는 정식 으로 효력을 상실했다.

이와 같이 특허 전략은 미국의 중요한 산업 전략이 되어왔으며 그것을 법원이 결정한다는 것은 법원 자신이 산업 정책에 관여한다는 것이 된다.

특허의 소용돌이를 노련하게 대처한 사람이 GM사의 창립자인 O.듀란드 였다. 그는 처음에는 ALAM측에 참가했으나 후에는 AMCMA 측으로 슬그머니 넘어 갔다. 보스턴에서 태어난 듀란드는 마차 제조의 메카(Mecca)인 미시간 주의 프린트에서 자라났다. 거기서 마차 특허를 취득하여 마차 제조업을 크게 벌였다. 자동차 붐이 일기 시작하자 당시 경영난에 봉착해 있던 뷰익 자동차회사를 매입하여 1904년에 자동차 산업에 참가했다.

스코틀랜드 태생의 데이비트 뷰익이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 것은 1902년의 일이었다. 이 뷰익사를 모체로 포드사까지 매수하여 일대 자동차회사를 만들려고 작정한 듀란드는 1908년에 우선 포드사와 교섭을 시작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올즈모빌사, 캐딜락사, 오크랜드사, 폰티악사, 그리고 프랑스 사람 레셔가 만든 챔피온 점화 플라그사, 그 밖의 자동차 부품 메이커를 합병하는데 성공하여 대기업으로서 GM사가 탄생했다.

헨리 포드는 트랜스미션을 올즈사에 납품하기도 하고, 경기용 차의 엔진을 설계하기도 한 기술사원 출신의 일개 엔지니어였다. 그러한 포드가 1903년에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자동차 산업에 참여했다. 회사 설립과 동시에 ALAM에 가입하려 했지만 용납되지 않았다. 실의에 찬 이 포드를 도와준 사람이 디트로이트의 석탄왕 알렉산더 말컴슨이었다.

그러나 닷지 형제가 설계한 6기통 엔진의 고급차 K형 포드를 회사의 주력 제품으로 하자고 주장하는 말컴슨과 값싼 차를 주장하는 포드 간의 의견 대립이 심했다. 그 결과 닷지 형제는 GM사에서 크라이슬러사로 옮겨가고 끝내는 말컴슨도 포드를 떠났다.

이제 전권을 장악한 포드는 우선 프랑스 르노사로부터 미네르바라는 모델을 구입하여 철저히 기술을 모방했다. 즉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 분해하여 기술을 훔치는 것)을 시작했다. 그리고 1905년에는 독일의 자동차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조셉 캬럼이란 헝가리 태생의 설계사를 고용하여 값싼 차를 개발했다. 이것이 포드사를 결정적으로 성공시킨 유명한 T형 포드였다. 최초의 T형 포드가 완성된 것은 1908년 10월 1일이었으며,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싼 가격인 850불 선에 판매했다. 포드는 그로부터 8년 후에는 이 가격을 360 불 선으로 떨어트렸다.

자동차 산업은 부품 조립 산업이므로 그 부품은 호환성이 있어야 하고, 표준·규격화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호환 표준부품 기술은 프랑스에서 미국에 들어와, 무기로부터 섬유기계, 재봉틀, 자전차 등의 순으로 파급되었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에서 이들 부품을 조립하는 단계에서는 재래식 기술이 답습되고 있었으므로 대량 생산에 필요한 기술발전이 별로 없었다. 이러한 자동차 산업의 전근대적 조립방식에 혁명을 가져온 것은 농업 및 식품가공 분야의 연속작업 기술이었다. 그 연속 작업 기술이 자동차 생산기술에 접목되었다. 연속작업 기술의 시초는 1787년 필라델피아의 농민인 올리버 에반스가 개발한 탈곡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위에서 밀을 넣으면 아래에서 밀가루가 되어 나오는 탈곡기를 개발했다. 

그리고 1800년대 말에는 신시나티의 식육업자가 고기덩이를 이동식 걸고리에 매어달아 연속 이동시켜 벨트컨베이어 위에서 다시 잘게 썰어내는 연속 작업방식을 개발했다. 웨스팅하우스는 이 신시나티 방식을 모방했다. 1880년에 이미 주물 앤드레스 체인을 사용하여 주물용 형사(型)를 운반하는 주물공장을 건설했다. 그 당시 어떤 회사도 연속 작업방식의 장점에 대해서 모르는 회사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개념을 과감히 받아 들이려는 태도,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는 결단력과 실천력이 문제였다. 디트로이트의 뷰의사도 1910년경 벨트 컨베이어를 시험적으로 채용해 보았지만 본격적 도입은 추진하지 않았다.

포드는 이 연속작업 방식을 과단성 있게 대대적으로 채용했다. 포드 자신의 회고록에는 시카고의 식육업자의 아이디어를 자동차 생산에 이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하튼 연속 작업방식 개념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값싼 차를 생산하는 데에 과감하게 응용한 포드의 판단은 탁월하고 위대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포드가 성공을 거둔 것은 연속작업 방식의 도입만으로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초의 미국의 상황에서, 비록 값이 싸다 할지라도 누가 그 많은 차를 사줄 수 있겠느냐가 문제였다. 도로는 포장되어 있지 않았고, 차를 이용하지 않아도 마차로 얼마든지 용무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량의 화물은 철도로 수송하면 그만이었다. 뿐만 아니라 말이 자동차를 보면 놀라서 오히려 위험을 자초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렇다면 누가 미국의 모터리제이션(자동차화)을 뒷받침한 고객이었단 말인가. 놀랍게도 그들은 도시 사람들이 아닌 농민들이었다.


1890년대에 미국은 세계적인 농산물 붐을 타고 증산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생산 과잉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게 되었다. 그래서 농촌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진출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자 경기가 회복되어 다시 곡물 수요를 공급이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0년대에 와서는 도시에 나간 젊은이들을 농촌으로 다시 데려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들을 다시 데려오는 수단으로서 농민은 값싼 T형 포드가 필요했던 것이다. 즉 자동차가 있으니 언제나 마음 내킬 때도시에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자동차를 농사에 이용하면 노동도 덜 고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이 설득방법은 효과가 있어 젊은이들은 농촌에 되돌아 왔다. 뿐만 아니라 당시 독점 철도 요금의 횡포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철도회사에 대한 반감에서 자동차로 농작물을 수송하는 것을 오히려 마음 편하게 생각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드는 농민들에게 적합한 자동차를 개발하여 공급을 시작했다. 이에 농민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동차를 구입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미국에 모터리제이션이 돌연 발생하게 되었다. 대량 생산방식으로 값싼 자동차를 공급하고, 그것을 농민들이 사들였다. 이러한 패턴으로 미국은 1920년대까지는 세계 제1의 자동차 왕국을 문자 그대로 눈깜짝할 사이에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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